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문단 편집) ===== 미켈란젤로의 설계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cdn.dipity.com/5bdfb6faf772cbdafc6403d196dd6f02_1M.jpg|width=100%]][[파일:external/classconnection.s3.amazonaws.com/etienneduperac1362671493032.jpg|width=100%]]}}}||{{{#!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images.bridgemanart.com/503189.jpg|width=100%]]}}}|| || 평면도/횡단면도 || 교황 비오 4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모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br]도메니코 크레스티, 1618~1619년, 캔버스에 유채, 236 x 141cm,[br] [[이탈리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 || 1546년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사망하자, 교황 [[바오로 3세]]는 70살을 넘긴 고령의 미켈란젤로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 책임을 맡겼다. 임명 초 내키지 않아 하던 미켈란젤로는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가 젊은 시절 로마에 왔을 때 봤던 유서 깊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바란 [[율리오 2세]]의 의지 때문에 확실한 설계안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철거되었고,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한 채 [[종교개혁]]과 [[사코 디 로마]]로 교황청의 위신이 곤두박질친 것과 맞물려 폐허와도 같은 풍경의 공사 현장은 [[가톨릭]]의 위기를 나타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미켈란젤로가 수석 책임자로 내정되기 10년 전인 [[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1/Heemskerck_Construction_of_St_Peters.jpg|1536년 당시 공사 현장 그림]]을 보면 어수선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보기에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안은 전임자들의 안을 절충하여 융합시키느라 이도 저도 아니었고, 외벽에는 열주가 지나치게 많으며, 공간도 지나치게 나뉘어져 있던 것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 때문에 공사 소요가 길어지며, 채광이 부족해 실내가 어두울 것이라고 보았다. 미켈란젤로가 상갈로 지휘하에 대성당 공사를 맡았던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고, 설계에 관여하고 싶어하는 건축 위원회 사람들에게 '당신들이 할 일은 공사 비용이 도둑맞지 않게 자금을 잘 관리하는 것뿐'이라며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자 졸지에 실업자로 전락한 상갈로파 관계자들은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며 수석 건축가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결국 교황 [[바오로 3세]]가 나서서 "공사에 관한 모든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위임하고, 건축 당국은 그의 설계대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못박으면서 미켈란젤로는 전임자들이 갖지 못한 특권을 얻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그 당시까지 지어져 있던 상갈로의 외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가 젊은 시절에 살아있었던 [[https://ko.wikipedia.org/wiki/도나토_브라만테|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와 사이가 안 좋았으나,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비전과 능력은 인정했다. 그래서 브라만테의 사후 이리저리 변질된 설계에 대해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초안을 나름대로 살려 자신만의 스타일로 정리했다.[* 한편 그는 이 과정에서 전임 설계자 상갈로 휘하의 사람들을 대거 잘라 버렸는데, 미켈란젤로와 상갈로는 생전에 사이가 절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브라만테에게 대적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상갈로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상갈로의 설계도를 보고 '구려.' 라고 평한 탓에 사이가 벌어졌다고.] 그리고 사실 상갈로를 포함한 전임자들의 안을 다 버리지도 않았다. 필요한 부분은 남기고, 단순화시킨 뒤 자신의 뛰어난 감각으로 재구성했다. 그는 브라만테의 초안대로, 평면을 입구에서 중심까지 짧은 동선을 가질 수 있는 중앙집중적인 그리스 십자가로 회귀시켜 성당의 돔을 잘 보이게 강조하였으며 [[가톨릭]]의 야심작다운 웅장함을 잘 드러내게 바꾸었다. 중앙부를 제외한 다른 내부 공간을 나누는 구획도 전임자들의 안을 단순화해 공간을 크게 만들어 장중한 분위기를 극대화시켰다. 물론 브라만테 설계안의 지나치게 번잡한 외벽 설계 등은 버리고, 두터운 외벽들로 만들고, 평면을 기하학적으로 보다 명쾌하게 정리하여 아름답게 만들었다. 외벽에는 상갈로의 불필요한 군더더기 기둥들을 쳐내고 거대 기둥을 사용하여 장중하게 처리하였다. 돔은 외벽에 맞춰 쌍기둥들과 뼈대(리브)로 이루어지게 만들어졌는데, 이는 상갈로의 안을 단순하게 만들어 아름답게 재구성한 것에 가깝다. 성 베드로 대성당 공사에 있어서 건물 중심부에 거대한 [[돔]]을 얹는 것은 브라만테의 설계안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것이었다. 그만큼 돔은 이 건물의 핵심 요소였으며 미켈란젤로도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켈란젤로는 돔을 설계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돔이었던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올라가 그 구조를 파악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설계한 돔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과 유사하게 두 겹의 벽돌 외피로 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피렌체의 돔과는 다소 다르게 완전한 반구형의 돔을 설계하였으며, 16쌍의 뼈대를 돔 외각에 덧붙이고 그 아래 드럼에는 두 쌍의 기둥들을 배치했다. 그리고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의 지름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보다는 살짝 작게 설계되었다. 미켈란젤로는 돔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드럼 일부만 완성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건축가가 되어 이 돔의 공사를 이어받았으며, 완성된 돔에는 대체적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설계가 반영되었지만 구조적인 이유로 외각 돔의 높이가 몇 미터 정도 높아져 반구형의 돔에서 첨두형의 돔으로 바뀌었다. 이는 원안보다 피렌체 성당의 돔에 가까워진 것. 미켈란젤로의 설계는 현재 지어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본 설계가 되었다. 다만 이 대성당의 정면과 신랑 등은 미켈란젤로 이후의 건축가들에 의해 변형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